내 이름으로 당당히 우뚝 서다



35년간 휠체어육상 선수와 지도자로 살면서 늘 자신과 외로운 싸움을 해온 박정호.
그가 이번에는 예술 세계에 발을 내딛고 오롯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2024년 11월, 자신의 감정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휠체어 무용수가 되어 첫 데뷔작 <I am That>을 성공적으로 무대 위에 올렸다.






이름 앞의 '장애인'을 지우다 

어릴 적 그는 어머니에게 업혀 학교에 다니면서도 늘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다 특수학교 '성세재활학교'를 알게 되었고,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사명을 얻었다. "하반신마비에 부모가 있는 저는 그곳에서 나름 부러움의 대상이었어요. 앞을 보지 못하거나 전신마비, 지체장애 등 저보다 훨씬 불편한 사람이 많았거든요. 게다가 대부분 고아였어요." 그 역시 보살핌을 받기 위해 들어온 곳이지만, 그는 곧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20대 여자 선생님들이 감당하기에는 육체적으로도 버거운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밥을 먹여주는 일부터 대소변을 봐주기까지 매 순간 전쟁통 같았다. 비록 하체는 쓸 수 없지만 팔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유독 힘이 좋았던 그는 친구들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장애인은 늘 누군가의 케어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다른 사람들을 돕다 보니 나의 존재감이 새롭게 다가왔어요. 이후 저는 스스로를 장애인이라는 틀에 가두지 않았죠."






스스로를 극한으로 내몰면서 느끼는 육상의 희열 

일찌감치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차별하지 않던 그는 세상에 이름을 알려나가기로 마음먹고 서울에 있는 삼육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비슷한 장애를 갖고 있거나 운동하는 친구들을 만나며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바로 육상이다. 200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베를린 마라톤대회에 참가했고, 2006년 쿠알라룸푸르 아시아태평양농아인게임 휠체어레이싱 종목에서 동메달 2개, 그다음 해 대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는 등 그의 활약상은 계속되었다. "스포츠는 자신과의 싸움이잖아요.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내가 깨는 것이 엄청난 희열이더라고요. 목표를 정하고 도장 깨기하듯 하나씩 올라가는 과정이 살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도파민이랄까요. 스스로를 극한으로 내몰면서 해내는 성취의 맛은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지 못하거든요." 그렇게 육상의 매력에 빠진 그는 선수로 23년, 지도자로 12년 총 35년간 스포츠인으로 살아왔다. 2011년 무용수 김용우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나 자신을 오롯이 들여다보며 표현하는 예술의 희열 

2011년 휠체어 무용수 김용우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휠체어댄스스포츠 선수였다가 무용을 하고 있던 김용우는 함께 무대에 설 무용수를 찾고 있었고, 탄탄한 몸매와 체력을 가진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때 그가 설득당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지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김용우의 취지 때문이었다. "저도 늘 장애인 인식 개선에 대해 고민이 많았거든요. 강연을 할 정도로요. 그런데 예술을 통해서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바로 합류하게 됐어요." 그렇게 10년간 취미로 무용을 하다 13년째 되는 2024년, 드디어 무대 위에 공연을 올릴 수 있었다. "극한으로 치닫는 나와의 싸움에서 성취감을 얻는 육상은 짧고 굵은 임팩트가 있는데, 무용은 생각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과정이 섬세하면서도 자유롭더라고요. 그 안에서 느끼는 희열은 좀 더 차분하고 깊은 느낌이랄까요." 흥미로운 점은, 창작 과정과 달리 무대에서 펼쳐지는 몸짓은 육상 못지않게 극한의 희열이 존재한다는 것. "제가 체력 하나는 타고났다고 자부하는 사람이고, 육상을 하면서도 체력적으로 힘든 적은 별로 없었거든요. 무용 연습을 하면서 완전히 녹다운되는 체력 고갈을 느낀 적이 있는데, 그 기분이 꽤 좋더라고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극한의 고통이 주는 희열이었던 거죠. 예술이 좋은 이유는 과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고, 그중 무용이 좋은 이유는 그와 함께 몸으로 표현하는 체력적 극함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I am That 

"저는 휠체어 타는 장애인을 '휠체어 유저'라고 표현하는데, 이번 작품 <I am That>에도 '휠체어'를 좀 가볍게 터치하고 싶었어요." 휠체어 고유의 존재성을 넘어 각자 살아가는 발걸음을 휠체어에 담아 무대에 옮긴 것이다. "실제로 비장애인 무용수에게 제가 동작을 따로 가르쳐주진 않았어요. 휠체어를 가지고 마음껏, 무례하게 활용하도록 했죠. 의자로 사용하든, 툭툭 던지든 무용수들이 느끼는 비장애인의 자유로움을 풀어놓은 거죠." 휠체어 유저에게는 장애를 얻기 전과 후 발 감각에 대한 공감을 얻고자 했고, 비장애인에게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각박하게 살아가는 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누군가의 삶에서든 휠체어가 다니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경험, 현실과 이상의 타협을 되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휠체어와 하나 된 무용수의 움직임이 결국 나와 그것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죠. 고정된 것도, 강요받는 것도 없는 나만의 삶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꽉 막힌 틀이나 벽이 있다면 부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삶이요." 이 공연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무용수들이 함께하면서 따로가 아닌, 결국 하나 되어 어우러진 사회를 보여주는 공연이기에 더욱 의미 있었다. 



당신의 발자국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나요? 

육상 선수이자 지도자, 장애인 인식 개선 강사, 휠체어 무용수, 안무가. 그에게 붙은 타이틀은 계속 늘고 있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에게 진짜 이루고 싶은 꿈을 물었다. "저는 테드(Ted)에 나가 강연을 하고 싶어요. 그 무대에서 이렇게 물어보고 싶거든요. '당신의 발자국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나요?'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각자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가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죠. 그런데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너무 애쓰며 앞만 보며 달려가는 우리가 안쓰럽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나의 발자국을 한 번쯤 뒤돌아본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이 훨씬 풍요로워지거든요. 이 메시지를 꼭 전하고 싶은 게 다음 목표이자 꿈입니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장애인'이지만, 그는 10대부터 지금까지 누군가를 돕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으며 살아왔다.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 내내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단단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김수영
사진 정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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