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기술, 패럴림픽의 보이지 않는 동반자

2026-03-19

b20d5feb0437b.png



패럴림픽이 열리는 기간, 선수촌 한편은 밤 11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의지보조기 기사, 용접공, 재봉사가 팀을 이뤄 선수들의 장비를 점검하고 수리한다. 오토복(Ottobock)이 1988 서울 패럴림픽대회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현장 풍경이다.




41964d8155d29.png

© 오토복코리아




서울에서 시작된 약속

오토복이 패럴림픽 기술 지원에 처음 나선 것은 1988 서울 패럴림픽대회 때였다. 당시 아시아에는 지사조차 없던 터라 호주 지사에서 3~4명을 파견해 컨테이너 부스 하나로 운영을 시작했다. 그것이 지금 IPC 월드와이드 파트너(Worldwide Partner)로 이어진 역사의 출발점이다. 이후 2년마다 하계·동계 패럴림픽을 거치며 지원 규모가 점점 커졌고, 현재 하계 패럴림픽 한 회에 투입되는 예산만 10억~15억 원에 달한다. 올림픽 선수에게 몸 컨디션을 관리해주는 팀 닥터가 있듯, 패럴림픽 선수에게는 장비를 책임지는 기술 지원팀이 필요하다. 몸이 멀쩡해도 장비가 망가지면 4년의 준비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지사인 (주)오토복코리아헬스케어(이하 오토복코리아)의 의지보조기 기사이자 아카데미 운영팀 송창호 팀장은 2014 소치 동계패럴림픽대회를 시작으로 리우데자네이루, 도쿄, 파리까지 패럴림픽이 열릴 때마다 현장에 파견됐다. “패럴림픽 기간 오토복의 기술 지원이 이뤄지는 메인 워크숍은 선수촌 안에 마련됩니다. 세계 각국의 오토복 지사에서 모인 기술자 10~15명이 상시 근무하며 오전 7시부터 밤 11시까지 운영하죠.” 오토복 제품이 아니어도 무상으로 수리해줄 만큼 브랜드를 가리지 않는 ‘기술적 중립성’이 원칙이다. 2014년에 열린 소치 동계패럴림픽 때 송 팀장은 한국 선수들을 워크숍으로 찾아오도록 독려했고, 그 대회에서 전체 참가국 중 한국 선수단의 수리 방문 건수가 1위를 기록했다. 이는 한국 선수단을 가장 가까이에서 챙긴 사람이 바로 오토복코리아 관계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ba31ac97bf138.png

패럴림픽이 열리는 곳마다 오토복의 워크숍도 함께 열린다. 1988년 서울부터 지금까지, 대회마다 현장을 지켜왔다.
© 오토복코리아



eb3d4be29a683.png

오토복코리아 사무실 한켠에 진열된 배지들. 현장에 나간 횟수만큼 쌓인 시간이다. 



76d9de2979c2c.png

오토복코리아 송창호 팀장. 소치부터 파리까지, 패럴림픽이 열리는 곳마다 현장에 있었다. 




패럴림픽 현장에 파견되는 인원은 의지보조기 기사만이 아니다. 용접공과 재봉사까지 별도로 채용해 팀을 꾸린다. ‘어벤저스팀’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 생기든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게 대비하는 셈이다. 2024 파리 패럴림픽대회에서는 휠체어 스프린터의 파이프가 부러지자 현장 펜스를 잘라 용접했고, 그 선수는 이후 메달을 획득해 BBC에 소개되기도 했다. 각 경기장마다 2인 1조의 소규모 데스크도 운영한다. 아이스하키, 휠체어럭비처럼 충돌이 잦은 종목은 용접팀이 반드시 배치된다. 육상 스프린터의 경우 탄소 카본 발에 균열이 생기거나 스파이크 하나만 빠져도 기록과 직결되는 만큼 경기 직전까지 의족의 각도와 정렬을 세밀하게 맞추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경기 현장에 오토복이 최소 인력을 배치하는 이유다.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대회는 오토복코리아에 더욱 각별했다. 1988년 서울에서 시작된 인연이 한국 땅에서 30년 만에 다시 이어진 대회였기 때문이다. 오토복코리아는 11개국 지사에서 모인 전문가들과 함께 대회 기간 내내 워크숍을 운영했고, 송 팀장은 대한민국 선수단 장비 운영 지원 매니저 자격으로 4주간 선수촌에 머물며 한국 선수들을 전담했다. “당시 스노보드 국가대표 김윤호・박항승 선수는 대회 전까지 일상용 의족으로 훈련해왔습니다. 일상용은 서 있는 자세에 최적화돼 보드를 탈 때마다 뒤로 밀렸죠. 그래서 스노보드 경기에 특화된 프로카브(ProCarve)와 유산소 훈련용 달리기 의족을 오토복코리아에서 별도로 지원했습니다.”



기술이 사람을 따라온다

오토복의 기술 철학은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된다. ‘사용자가 기술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사용자를 따라온다.’ 마이크로프로세서 무릎관절 지니움 X4(Genium X4)는 초당 100회 데이터를 분석해 지형과 보행 패턴을 스스로 인식한다. 전자 의수 비바이오닉(Bebionic)은 팔 전체 근전도를 읽어 사용자가 의도하는 동작을 자동으로 학습한다.
오토복코리아 마케팅팀 조정훈 매니저는 이렇게 말한다. “기술은 사용자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의지를 세상에 전달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도구입니다. 사용자가 일상에서 겪는 아주 작은 불편함부터 다시 꿈꾸는 도전까지, 철저히 사용자의 시선에서 고민할 때 결국 기술의 정점에 사람이 놓이게 됩니다.” 



09147d919cd73.png

오토복코리아의 조정훈 브랜드 매니저. 작업 치료사로서 사용자의 일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읽는다. 




마이크로프로세서 의족 메리디움(Meridium)은 일상용이지만 삶의 반경을 바꿔놓는다. 송 팀장은 이와 관련해 어느 고객의 이야기를 꺼냈다. “절단장애를 가진 그 고객분은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지팡이와 여분의 의족을 챙겨야 했고, 딸들과 물놀이 한번 못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메리디움을 착용한 지 1년쯤 후에 이런 메시지를 보내셨어요. ‘내 세상이 넓어졌다.’”



1b8b8cdb20f31.png

오토복 마이크로프로세서 의족 메리디움(Meridium)




오토복은 전 세계 패럴림픽 선수들을 기술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각국 지사를 통해 현지 선수들과 밀착 지원을 이어간다. 한국 선수들은 오토복코리아가 직접 맡는다. 사이클 박찬종 선수는 경기 중에도 실시간으로 피드백을 보낼 만큼 긴밀한 협업이 이뤄지고 있다. 카누 최용범 선수는 2024 파리 패럴림픽대회 기수를 맡던 시기에 맞춤 의족을 지원받았고, 보치아 정소영 선수는 앞으로 몸을 뻗는 동작에서 휠체어가 고꾸라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게추 조정과 프레임 용접 수정 작업을 함께 진행 중이다. 



50fb0704f451e.png

카누 최용범 선수. 2024 파리 패럴림픽대회 기수로 입장한 그의 의족은 오토복코리아가 함께 맞췄다. 


c5a4c528230b3.png

보치아 정소영 선수. 오토복코리아와 휠체어 보완 작업을 함께 이어가고 있다. 


a5a0ec6d8de78.png

사이클 박찬종 선수. 스포츠 의족과 일상용 의족을 지원받으며 오토복코리아와 밀착 협업 중이다.
© 오토복코리아 




그중에서도 송 팀장의 기억에 오래 남은 장면이 있다. 어릴 때 다쳐 달리기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아이스하키 정승환 선수는 오토복코리아가 달리기용 의족을 지원하자 처음으로 트랙을 뛰었다. 정승환 선수는 숨이 차오르는 게 그렇게 기뻤다고 했다. 송 팀장은 그때를 떠올리며 “누군가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직업이라는 생각을 처음 했다”고 전했다. 



경기장 밖의 24번째 종목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의 스포츠 활동은 여전히 높은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전문 스포츠 장비나 스포츠용 의족은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비용이고, 운동을 취미로 이어가는 것 자체가 도전이 되는 경우가 많다. 신체 활동의 기회가 줄어들면 건강 악화로 이어지고, 외부 활동이 위축되면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조 매니저는 “패럴림픽이라는 세계 무대에서 기술 지원은 결국 그 기술이 일상으로 내려와 누구나 스포츠를 즐기고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라고 말한다. 오토복이 장애인스포츠 후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f9533290c24e2.png

오토복의 캠페인 '또 하나의 종목(Unofficial Discipline)'. 장애인에게 일상은 이미 하나의 종목이라는 메시지를 2024 파리 패럴림픽 현장 곳곳에 새겼다. 




2024 파리 패럴림픽대회를 기점으로 오토복은 ‘또 하나의 종목(Unofficial Discipline)’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패럴림픽에 23개 공식 종목이 있지만, 장애인에게는 매일 고장 난 엘리베이터, 가파른 계단, 좁은 문, 그리고 편견이라는 비공식적인 24번째 종목이 있다는 메시지다. 파리 현지에서는 계단과 좁은 통로 등 이동을 가로막는 곳마다 이 문구를 새겨 넣었다.
국내에서는 직접적 이동권 주장 대신 스포츠 활동으로 우회하는 방식을 택했다. 조 매니저는 “마라톤에 참가하고 싶은 절단장애인이나 휠체어 사용자의 장비를 정비해드리거나, 스키 캠프를 지원해 이런 게 필요하다는 것을 먼저 알리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사용자가 있어야 필요성이 증명되고, 필요성이 증명되어야 정책이 바뀐다는 순서를 믿는다고.



53b718d5349a2.png

ef1128a720687.png

오토복코리아가 지난해 진행한 스키 캠프. 스포츠 의족과 AI 무릎을 지원받은 지체 장애인들이 스키와 보드를 탔다.
© 오토복코리아




오토복코리아의 일상도 같은 방향을 향한다. 지난해 오토복코리아는 성수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했는데, 성동구를 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성동구는 국내에서 배리어프리 환경을 구축하는 데 가장 적극적인 자치구 중 하나다. 조 매니저는 "성동구의 장애인 친화 도시 비전과 오토복의 철학을 결합하려는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사무실을 보면 그 말이 그대로 구현된 것을 알 수 있다. 문턱이 없고, 통로가 넓으며, 가벽과 파티션을 최소화한 것이다. 자동문이 설치되어 있고, 의족 사용자가 직접 제품을 체험하고 훈련할 수 있는 전용 트레이닝 공간이 마련된 점이 특징이다. 정밀한 소켓 제작을 위한 피팅 룸과 국내 최대 규모라는 전문가 교육 공간도 갖췄다.
“장애인에게 일상은 그 자체로 보이지 않는 경기와 같습니다. 사무실 하나를 꾸리더라도 그 경기를 한 종목이라도 줄여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c81e229a4819f.png

b3e7527fd226b.png

지난해 성수동으로 이전한 오토복코리아 사무실. 턱과 가벽을 없애고, 휠체어가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도록 설계했다.




100년 동안 놓지 않은 한 가지

오토복코리아는 3년 전부터 교육 공간을 마련하고 국내 의지보조기 기사들을 대상으로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전국에 흩어진 거래처 기사들이 제품을 제대로 다룰 수 있어야 최종 사용자에게 더 나은 서비스가 닿는다는 판단에서다. 송 팀장은 오토복 본사에서 글로벌 트레이너 자격을 취득해 국내 기사에게 직접 제품 인증 교육을 하고 수료 인증을 수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올해는 아카데미 인력을 한 명 더 추가해 교육 범위를 넓힐 계획이다.
“결국 모두의 기술력이 올라가야 사용자들이 잘 쓸 수 있어요. 잘 쓰다 보면 활동력도 높아지고, 삶의 질도 올라갑니다.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3f6bc9fd5d5fe.png

37e17f7fb4bab.png

8dcb8a8b56460.png

오토복코리아 아카데미 현장. 의지보조기 기사, 물리치료사 등 유관 직업군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한다.
© 오토복코리아




패럴림픽 시즌이 되면 오토복의 40개국 이상 지사에서 동시에 같은 이벤트가 열린다. 각 종목을 사무실 안에서 간접 체험하는 방식으로, 아이스하키라면 앉은 자리에서 병뚜껑을 쳐서 페트병을 쓰러뜨리는 식이다. 지사별로 점수를 매겨 본사에 보내지만, 실제로는 경쟁이 아닌 ‘우리가 더 잘 놀고 있다’를 어필하는 축제에 가깝다. 조 매니저는 “경기장에서의 축제뿐 아니라 각 나라별로 자체적으로 축제를 즐겼으면 좋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114154cb030c0.png

3eddc5c0542d8.png

패럴림픽 시즌마다 오토복의 40개국 이상 지사에서 동시에 펼쳐지는 이벤트. 각 지사 직원들이 패럴림픽 종목을 사무실 안에서 직접 체험하며 함께 축제를 즐긴다.
© 오토복코리아



30503a4d5a3ac.png



오토복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에서 시작됐다. 전쟁으로 사지를 잃은 이에게 움직임을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움직임을 회복하는 데 100년을 쏟아낸 회사. 그 시간이 쌓인 만큼 지금도 오토복은 전쟁이 나는 곳에 제품을 보내고, 패럴림픽이 열리는 곳마다 현장에 나간다. IPC 월드와이드 파트너 역할도, 성수동 사무실에서 이어지는 일상의 지원도 같은 방향을 향한다. 인간에게 움직임의 자유를 돌려주는 것. 오토복이 100년 동안 놓지 않은 한 가지다.






 유명은
사진 정재환




         


05540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로 424 올림픽회관 신관
대한장애인체육회 홍보마케팅부 02-3434-4533

서비스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어빌리브에 실린 글, 그림, 사진 등 모든 자료 가운데 저작권자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대한장애인체육회에 저작권이 있으며, 서면 동의 없이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COPYRIGHT 2008-2023 KPC ALL RIGHTS RESERVED.

어빌리브에 실린 글, 그림, 사진 등 모든 자료 가운데 저작권자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대한장애인체육회에 저작권이 있으며, 서면 동의 없이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05540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로 424 올림픽회관 신관 
대한장애인체육회 홍보마케팅부 02-3434-4533
COPYRIGHT 2008-2023 KP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