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윤선 작가]지금 여기서 행복하기



불갑사의 가을, 상사화와 함께하는 무장애 여행



"그대를 만날 때면 이렇게 포근한데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사랑을 어쩌면 좋아요." 가을이면 생각나는 '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라는 노래 가사다.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이 노래를 따라가야 할 것 같은 여행지가 있다. 늘 곁에 있어 사랑이 사랑인 줄 모르는 무뎌진 세포를 깨우기 위해 불갑사로 향했다. 불갑사는 가을이 시작될 즈음이면 상사화가 무리 지어 피어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꽃 '상사화'는 전설 속 슬픈 이야기로 전해진다. 잎과 꽃이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연인 간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상징한다. 시나 소설, 예술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상사화.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애절하다. 로미오와 줄리엣, 견우와 직녀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붉은 울음을 토해내 상사화로 피어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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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갑사 담장 아래 핀 상사화




불갑산은 7월 중순부터 진노랑 상사화가 피기 시작해 9월 중순이면 붉은 꽃 무리가 산을 온통 붉게 물들인다. 멀리서 보면 불갑산 일원에 산불이 난 것처럼 빨갛다. 이별 꽃이라 불리는 붉은 상사화는 꽃술이 길고 비늘줄기는 절에서 탱화나 불경을 제본할 때 방부제로 쓰인다.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있을 때는 잎이 없어 잎은 꽃을 생각하고 꽃은 잎을 생각한다고 해서 남녀 간 애틋하고 간절한 사랑을 의미한다. 석산(꽃무릇)은 꽃모릇 혹은 붉은 상사화로 불리며 옛날 가난한 백성들이 구황식품으로 사용했다. 꽃무릇 알뿌리에 함유된 녹말을 걸러 죽을 끓일 수 있는데, 알뿌리에 독소가 있어 이를 가라앉히려면 꽤 시간이 걸렸다고. 이를 참지 못하고 그냥 죽을 쑤어 먹으면 배탈이 나 곤욕을 치렀기에 "자발스러운 귀신은 무릇 죽도 못 얻어먹는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은 독초도 먹을 수 있도록 가공해 식량으로 사용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그래서 K-푸드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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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을 꺼내 연신 셔터를 누르니 붉은 상사화가 카메라 속으로 마구 들어온다. 꽃을 따라 불갑사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다양한 조형물이 얼른 사진 찍으라고 손짓한다. 이맘때 주인공은 상사화지만 조연의 역할도 분주하다. 사랑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다. 그 사랑이 애증이든 열정이든, 사랑이 시작돼야 이별도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더 애틋하고 애절한 것처럼, 사랑도 일도 관계도 실패를 경험해야 성공할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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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상사화 군락지
(오른쪽) 안내센터 뒤에 마련된 장애인 화장실




불갑사 일원은 열린 관광지로 조성된 후 접근성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야자 매트가 있던 자리는 데크가 설치됐고, 비좁고 하나뿐이던 남녀 공용 장애인 화장실은 안내센터 뒤에 남녀 장애인 화장실로 널찍하게 변모했다. 주차장에서 안내센터 쪽으로 휠체어 보행로도 새로 만들었다. 열린 관광지 조성 전후를 보면 확연히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불갑사 관광지도 그렇다. 상사화 군락지도 데크를 따라 사뿐히 이동할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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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산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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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 전시 중인 자수 명인 김현숙 작가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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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로가 설치돼 오르내릴 수 있는 탑원



일주문을 지나 처음 만나는 곳은 영광산림박물관이다. 산림박물관은 영광 지역에 자생하는 산림의 모든 것을 전시하고 있다. 상사화 축제 기간에는 자수 명인 김현숙 작가의 개인전이 열린다. 천 위에 펼쳐지는 예술 세계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녀의 작품 속에 핀 꽃무릇은 가을빛으로 찾아온 그리움이다. 박물관에는 장애인 화장실이 마련돼 있다. 박물관에서 나와 탑원으로 향했다. 탑원은 간다라(파키스탄 서북부) 지역의 토목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 탑원 중앙에는 경사길이 나 있어 휠체어를 타고도 진입이 가능하다. 탑원을 한 바퀴 돌아본 뒤 발길을 옮겨 불갑사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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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갑사 왼쪽으로 짧은 경사길을 지나면 경내다. 사찰에 울려 퍼지는 예불 소리에 긴장된 마음이 차분해진다. 불갑사에는 유독 노인과 등산객이 많다. 불갑산 자락에 폭 안긴 사찰이라 등산객에게 안성맞춤 여행지인 듯하다. 탐방로는 다섯 코스가 있어 운동 삼아 불갑산에 오르는 사람이 제법 많다. 수동휠체어를 탄 노인과 가족도 눈에 띈다. 그러고 보면 전동휠체어를 타고 여행하면 좋은 점도 많다. 먼 길을 떠나도 다리가 아프지 않아 주변을 자세히 둘러볼 수 있다. 몸이 편안하니 마음도 여유로워 여행하는 내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전동휠체어는 배터리 동력으로 움직인다. 내가 사용하는 전동휠체어 배터리는 30km는 거뜬히 이동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하루 종일 불갑사일원을 둘러봐도 배터리 걱정 없이 희희낙락 즐겁기만 하다.

여행을 시작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장애인, 노인, 영·유아 동반 가족 등은 더더욱 그렇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 등 관광 약자에게 접근 가능한 여행은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무장애 여행은 물리적 접근성, 정보 접근성, 서비스 접근성까지 장벽 없는 여행을 추구해 관광 약자의 여행 권리를 보장한다. 최근 산사에도 장애인과 고령층 여행객이 증가하면서 접근성을 개선하고 있다. 하지만 산이라는 지형적 특성과 문화유산이 많아 개선 속도가 더디다. 그렇다고 산사 여행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조금씩 개선되는 산사를 자꾸 찾다 보면 어느 순간 무장애 사찰 여행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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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해우소가 있다. 장애인 화장실에서 근심을 비우려다 되레 근심이 쌓이고 말았다.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우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관광 약자를 위한 편의 시설이 갖춰진 해우소임에도 불갑사 장애인 화장실은 휠체어가 진입하면 문이 닫히지 않는다. 화장실은 오롯이 자신만의 공간이어야 한다. 외부에 노출되면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비울 수 없는 여행은 불안과 초조함으로 여행의 질마저 떨어뜨린다.

발길을 돌려 부처님을 만나는 대웅전으로 갔다. 늘 그렇듯이 대웅전은 계단투성이다. 경계 진 계단 때문에 대웅전 안으로 진입할 수 없어 부처님도 뵐 수 없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과 넘을 수 없는 것이 어디 계단뿐이던가. 사회 곳곳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지천이다. 성별이 달라, 피부색이 달라, 휠체어를 타서, 가난해서, 학벌이 나빠서, 지역이 달라서, 나라가 달라서 등 다양한 경계에 밀려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밀려나지 않으려 애쓰는 이에게 불갑사는 위로를 건넨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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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갑사 저수지




불갑사 저수지로 발길을 돌렸다. 휠체어 탄 여행객도 저수지 산책길은 편안하게 갈 수 있다. 물과 숲이 만나는 불갑사 저수지를 보니 마음의 찌든 때가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빠르게 돌아가는 첨단 사회는 번아웃을 유발한다. 경쟁이 심화되고 자칫 속도에 뒤처져 따라가지 못하거나 포기하게 만든다. 속도 조절도 버겁고, 정도 조절은 생각조차 못한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 무능력자라는 생각에 자책하고 도태되기 마련이다. 속도에 지친 내게 불갑사는 말을 건넨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스스로 속도를 조절하는 마음이라고.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 여행은 일상을 기록하고 기억을 저장하기 좋은 활동이다. 여행하기 좋은 시기는 바로 오늘이다. 오늘이 가장 젊고 장애도 가장 경한 날이다. 느긋하게 불갑사 경내를 둘러보며 마음의 빈 공간을 채워본다. 



 여행 정보  

가는 길KTX 목포역에서 콜택시 이용
※ 장애인 콜택시 이용 시: 전남광역이동지원센터 콜택시 이용 1899-1110
※ 영광군 내 교통 약자 차량 6대 운행
접근 가능한 식당풍성한 집
주소: 전남 영광군 법성면 법성포로3길 60
문의: 061-356-0733
접근 가능한 화장실불갑사 안내센터 뒤, 영광산림박물관 내, 풍성한 집 옆








글・사진  전윤선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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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선
휠체어를 타고 제주 올레길 완주를 비롯해 유럽, 북미, 아시아, 호주 등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방송, 칼럼, 강연을 통해 세상과 여행담을 나누며 무장애 관광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익숙한 풍경 낯선 이야기>, <아름다운 우리나라 전국 무장애 여행지 39>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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