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등급분류사, 지도자, 심판, 체육 행정, 코치 에듀케이터. 권제형은 한 분야에서 거의 모든 역할을 경험했다. 2024 파리 올림픽대회 조정 경기장에 대한민국 심판복을 입고 선 그는 대한민국 조정 역사상 쾌거를 이룬 주인공이자 스포츠 현장에서 35년을 살아남은 '생존자'이기도 하다. 그가 걸어온 길은 지금 현장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2005년, 한 통의 전화
"장애인조정이 2008 베이징 패럴림픽대회 때부터 정식 종목이 된대. 홍콩에서 하는 국제 세미나에 가서 들어봐."
2005년 말, 호주 어학연수를 막 마치고 돌아온 권제형.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그에게 교수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때는 몰랐다. 이 전화 한 통이 20년 여정의 시작이 될 줄은. 홍콩 워크숍에서 그는 한양대학교구리병원 재활의학과 한승훈 의사와 함께 등급분류사 교육을 받았다. 의사는 메디컬 관점에서, 그는 조정 기술(테크니컬) 관점에서 장애인 선수들을 평가하는 방법을 배웠다.
"의사 선생님은 의학 용어로 이해하려 했고, 저는 조정 용어가 나오는 걸 캐치할 수 있었어요. 영어를 아주 잘하진 못했지만, 움직임에 대한 건 조정 선수 출신이라 더 많이 알았죠."
2006년 2월, 등급분류사 자격을 얻어 돌아왔다. 하지만 연맹도 없고, 선수도 없었다. 그리고 2006년 7월 장애인조정연맹이 창립됐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이다.
메달 박탈에서 메달 수호까지
창립 멤버로 시작한 그의 여정은 곧 지도자의 길로 이어졌다. 스물아홉 살에 최연소 감독이 된 그는 2010 광저우 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에서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대한민국 선수가 은메달을 땄지만, 현장에서 실격 처리된 것. 규정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피트(fit)와 픽스드(fixed)의 차이였어요. 장비를 '걸쳐놓는' 것과 '고정하는' 것의 차이. 4시간을 싸웠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결국 선수는 시상대에 오르지 못했다. 국제조정연맹에 어필한 결과 1년 반 만에 "네가 옳았다"는 답을 들었지만 이미 해당 대회 조직위원회는 해체됐고, 메달을 되찾을 수도 없었다. 다만 이후 규정이 명확하게 개정됐다.
감독직을 사임하고 국제심판이 되었다. 그렇게 4년이 흐른 뒤 2014 인천 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에서 심판으로 경기장에 섰다. 대한민국 팀이 금메달 2개를 포함해 3개의 메달을 땄다.
"그때 현장에서 제가 심판인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결승 경기에서 중국이 이의를 제기했다. 한국 선수의 자세가 규정을 위반했다는 주장이었다. 비디오를 보니 각도에 따라 애매해 보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2010년의 교훈이 있었기에 저는 정확히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어요. 심판들과 그 기준을 공유했고, 규정에 따라 '문제없음'이라는 결론이 났죠. 자국 심판이 현장에 있다는 건, 규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공유하고 오해를 방지할 수 있다는 의미예요."
이것이 국제심판의 진정한 역할이다. 편파적 판정이 아니라 애매한 상황에서 규정을 명확히 해석하고 공정한 판정을 돕는 것.
한편 국제심판이 되기까지 과정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국제조정연맹은 3아웃 제도를 운영한다. 세 번 떨어지면 영원히 시험을 볼 수 없다. 그는 두 번 떨어졌고, 2011년 마지막 기회에서 극적으로 합격했다.
"배지가 딱 하나 남았는데, 제 이름이 안 나왔어요. '이제 평생 시험을 못 보는구나' 생각했는데, 마지막 이름이 저였어요. 선수로 스타트라인에 섰을 때보다 더 긴장됐죠."
국제조정연맹은 장애인 조정(파라로잉)을 별도 종목이 아닌, 한 카테고리로 분류한다. 올림픽과 패럴림픽은 별도 대회지만, 심판 자격 체계는 하나다. 그렇게 국제심판 자격을 얻은 그는 2016 리우 패럴림픽대회 심판을 거쳐 2024 파리 올림픽대회 심판으로 섰다. 대한민국 조정 100년 역사상 올림픽 무대에 한국인 심판이 선 것은 처음이다.
모든 역할이 하나로
장애인스포츠는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2012 런던 패럴림픽대회 이후 어머니가 위독할 때도 그는 척수장애인 선수들을 훈련시키며 배운 재활 방법을 적용했다.
"감각이 없는 부위도 계속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해드렸어요. 3~4개월 하다 보니 어머니가 손만 잡아주면 걸을 수 있게 됐죠."
선수 시절이나 지도자 시절에 배운 것들이 삶으로 이어졌다. 2024년, 권제형은 코치 에듀케이터가 됐다. 지도자를 교육하는 지도자. 아시아에서는 홍콩과 한국, 단 두 명뿐이다. 지난해 홍콩에서 정식 코스를 수료했고, 올해 상하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 활동했다.
"강의할 때 이 모든 경험이 녹아나요. 선수들에게는 '심판의 움직임 하나가 경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할 수 있고, 지도자들에게는 '선수 입장에서 심판이 어떻게 보이는지' 함께 고민할 수 있거든요."
그동안의 모든 역할이 비로소 하나로 통합되는 순간이었다. 선수로서 경험, 지도자로서 실패와 성공, 심판으로서 통찰. 이 모든 것이 코치 에듀케이터라는 역할 안에서 빛을 발했다.
"우리나라는 아직 이 역할이 생소할 거예요. 선수 한 명이 좋은 성적을 내면 그게 지도자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지도자의 역량은 그보다 훨씬 넓고 깊어요."
그가 강조하는 것은 지속적인 교육과 성장이다. 자격증 취득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
"자격증을 따는 순간, 그게 완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현장은 계속 변화해요. 안전기준, 선수와의 소통 방식, 최신 규정 등을 꾸준히 업데이트해야 하죠."
35년간 스포츠 현장에 몸담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꾸준함, 그리고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
"젊을 때는 내가 강하니까 살아남는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알아요. 끝까지 살아남으니까 강한 사람이 되더라고요."
조정을 정말 사랑하는 만큼 조정 종목에 몸담고 있는 후배들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후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꾸준함, 그리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배우는 자세.
"자기 종목을 꾸준히 하면서 관심 있는 분야를 계속 공부하세요. 궁금한 건 물어보고요. 저는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열정을 갖고 정성을 다하면 결국 내 것이 되죠."
선수, 등급분류사, 지도자, 심판, 체육 행정, 코치 에듀케이터.
권제형은 한 분야에서 거의 모든 역할을 경험했다. 2024 파리 올림픽대회 조정 경기장에 대한민국 심판복을 입고 선 그는 대한민국 조정 역사상 쾌거를 이룬 주인공이자 스포츠 현장에서 35년을 살아남은 '생존자'이기도 하다. 그가 걸어온 길은 지금 현장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2005년, 한 통의 전화
"장애인조정이 2008 베이징 패럴림픽대회 때부터 정식 종목이 된대. 홍콩에서 하는 국제 세미나에 가서 들어봐."
2005년 말, 호주 어학연수를 막 마치고 돌아온 권제형.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그에게 교수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때는 몰랐다. 이 전화 한 통이 20년 여정의 시작이 될 줄은.
홍콩 워크숍에서 그는 한양대학교구리병원 재활의학과 한승훈 의사와 함께 등급분류사 교육을 받았다. 의사는 메디컬 관점에서, 그는 조정 기술(테크니컬) 관점에서 장애인 선수들을 평가하는 방법을 배웠다.
"의사 선생님은 의학 용어로 이해하려 했고, 저는 조정 용어가 나오는 걸 캐치할 수 있었어요. 영어를 아주 잘하진 못했지만, 움직임에 대한 건 조정 선수 출신이라 더 많이 알았죠."
2006년 2월, 등급분류사 자격을 얻어 돌아왔다. 하지만 연맹도 없고, 선수도 없었다. 그리고 2006년 7월 장애인조정연맹이 창립됐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이다.
메달 박탈에서 메달 수호까지
창립 멤버로 시작한 그의 여정은 곧 지도자의 길로 이어졌다. 스물아홉 살에 최연소 감독이 된 그는 2010 광저우 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에서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대한민국 선수가 은메달을 땄지만, 현장에서 실격 처리된 것. 규정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피트(fit)와 픽스드(fixed)의 차이였어요. 장비를 '걸쳐놓는' 것과 '고정하는' 것의 차이. 4시간을 싸웠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결국 선수는 시상대에 오르지 못했다. 국제조정연맹에 어필한 결과 1년 반 만에 "네가 옳았다"는 답을 들었지만 이미 해당 대회 조직위원회는 해체됐고, 메달을 되찾을 수도 없었다. 다만 이후 규정이 명확하게 개정됐다.
감독직을 사임하고 국제심판이 되었다. 그렇게 4년이 흐른 뒤 2014 인천 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에서 심판으로 경기장에 섰다. 대한민국 팀이 금메달 2개를 포함해 3개의 메달을 땄다.
"그때 현장에서 제가 심판인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결승 경기에서 중국이 이의를 제기했다. 한국 선수의 자세가 규정을 위반했다는 주장이었다. 비디오를 보니 각도에 따라 애매해 보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2010년의 교훈이 있었기에 저는 정확히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어요. 심판들과 그 기준을 공유했고, 규정에 따라 '문제없음'이라는 결론이 났죠. 자국 심판이 현장에 있다는 건, 규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공유하고 오해를 방지할 수 있다는 의미예요."
이것이 국제심판의 진정한 역할이다. 편파적 판정이 아니라 애매한 상황에서 규정을 명확히 해석하고 공정한 판정을 돕는 것.
© 권제형
한편 국제심판이 되기까지 과정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국제조정연맹은 3아웃 제도를 운영한다. 세 번 떨어지면 영원히 시험을 볼 수 없다. 그는 두 번 떨어졌고, 2011년 마지막 기회에서 극적으로 합격했다.
"배지가 딱 하나 남았는데, 제 이름이 안 나왔어요. '이제 평생 시험을 못 보는구나' 생각했는데, 마지막 이름이 저였어요. 선수로 스타트라인에 섰을 때보다 더 긴장됐죠."
국제조정연맹은 장애인 조정(파라로잉)을 별도 종목이 아닌, 한 카테고리로 분류한다. 올림픽과 패럴림픽은 별도 대회지만, 심판 자격 체계는 하나다.
그렇게 국제심판 자격을 얻은 그는 2016 리우 패럴림픽대회 심판을 거쳐 2024 파리 올림픽대회 심판으로 섰다. 대한민국 조정 100년 역사상 올림픽 무대에 한국인 심판이 선 것은 처음이다.
모든 역할이 하나로
장애인스포츠는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2012 런던 패럴림픽대회 이후 어머니가 위독할 때도 그는 척수장애인 선수들을 훈련시키며 배운 재활 방법을 적용했다.
"감각이 없는 부위도 계속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해드렸어요. 3~4개월 하다 보니 어머니가 손만 잡아주면 걸을 수 있게 됐죠."
선수 시절이나 지도자 시절에 배운 것들이 삶으로 이어졌다.
2024년, 권제형은 코치 에듀케이터가 됐다. 지도자를 교육하는 지도자. 아시아에서는 홍콩과 한국, 단 두 명뿐이다. 지난해 홍콩에서 정식 코스를 수료했고, 올해 상하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 활동했다.
"강의할 때 이 모든 경험이 녹아나요. 선수들에게는 '심판의 움직임 하나가 경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할 수 있고, 지도자들에게는 '선수 입장에서 심판이 어떻게 보이는지' 함께 고민할 수 있거든요."
그동안의 모든 역할이 비로소 하나로 통합되는 순간이었다. 선수로서 경험, 지도자로서 실패와 성공, 심판으로서 통찰. 이 모든 것이 코치 에듀케이터라는 역할 안에서 빛을 발했다.
"우리나라는 아직 이 역할이 생소할 거예요. 선수 한 명이 좋은 성적을 내면 그게 지도자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지도자의 역량은 그보다 훨씬 넓고 깊어요."
그가 강조하는 것은 지속적인 교육과 성장이다. 자격증 취득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
"자격증을 따는 순간, 그게 완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현장은 계속 변화해요. 안전기준, 선수와의 소통 방식, 최신 규정 등을 꾸준히 업데이트해야 하죠."
35년간 스포츠 현장에 몸담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꾸준함, 그리고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
"젊을 때는 내가 강하니까 살아남는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알아요. 끝까지 살아남으니까 강한 사람이 되더라고요."
조정을 정말 사랑하는 만큼 조정 종목에 몸담고 있는 후배들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후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꾸준함, 그리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배우는 자세.
"자기 종목을 꾸준히 하면서 관심 있는 분야를 계속 공부하세요. 궁금한 건 물어보고요. 저는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열정을 갖고 정성을 다하면 결국 내 것이 되죠."
그리고 상기된 표정으로 덧붙였다.
"저는 아직 이루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역시! 마침표는 아직 이르다.
글 유명은
사진 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