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만리, 선후와 함께 발견한 우리의 빛나는 여정

2025-05-21



우리가 발견한 새로운 선택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 <어바웃 타임>을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남편에게 물었다. 

"자기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 

"음, 군대 제대한 날? 아니지, 그럼 선후를 못 만날 수도 있으니 안 되겠네. 2005년 4월 15일 이전으로는 못 가지." 

같은 영화를 봐도 늘 감상이 다른 우리지만, 그날만큼은 정확히 일치했다. 

"그냥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지 말자." 

선후를 키우면서 내가 조금 더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 날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장애아를 키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상동행동(반복된 행동)이 가장 힘들었다.
단순히 타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이대로 자라면 선후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고 울타리 안에 갇히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선후의 상동행동을 줄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나, 아빠, 할머니가 거의 3교대로 돌면서 자는 시간 외에는 계속 무언가를 시키며 상동행동을 할 틈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너무 힘들었고, 우리는 점점 지쳐갔다. 


'이 터널에 정말 끝이 있을까? 어쩌면 그냥 영원히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한동안은 그런 생각 속에서 힘겹게 버틴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어둡고 긴 터널이라도 끝은 있기 마련.
저 멀리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을 품고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터널 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체육활동에서 발견한 우리의 가능성

그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건 등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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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에서 우리는 선후의 빛나는 미소와 가족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했다. 장애라는 한계를 넘어 함께 성장하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선후의 체력을 소진시키면 상동행동이 줄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기대 이상이었다.
체력뿐 아니라 상동행동도 눈에 띄게 줄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늘면서 엄마 아빠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선후가 우리를 더 자주 찾기 시작했다.
우리도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산을 탔다.
이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등산이 되어버렸다. 


지리산을 등반할 때였다.
코스 욕심을 부리다 12시간이 넘는 산행이 되어버렸다.
원래 체력이 부족한 편이라 마지막 몇 시간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을 참아내며 어두운 산길을 헤드 랜턴에 의지해 내려왔을 때, 더는 걷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
감과 함께 내 안을 관통하는 듯한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특별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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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정상에서 함께한 우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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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후는 2023년 울산에서 열린 전국장애학생체육대회 디스크 골프 종목에서 은메달의 영광을 안았다. 




디스크 골프 종목으로 참가했던 전국장애학생체육대회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세종특별자치시장애인체육회에서 실력이 부족한 선후를 정성껏 지도해주고 시합에도 참가하게 해주었다.
고마운 마음과 함께 '다음에는 적어도 민폐는 끼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아빠와 선후는 개인 훈련에 돌입했고, 열심히 연습한 결과 2023년 제17회 전국장애학생체전에서 은메달이라는 값진 결과를 얻었다.
특히 시상식에서 활짝 웃는 선후의 모습은 살면서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선후도 그 결과를 이해했을까? 아니면 분위기가 좋아서였을까?
아무튼 그 순간은 어딘가에서 빛이 우리를 비추는 듯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선후가 알려준 특별한 순간

선후는 의사소통은 어려워하지만, 좋았던 기억은 누구보다 잘 간직하는 것 같았다.
대마도에서 열린 마라톤에 약 3년 간격으로 두 번 참가했는데,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예전에 묵었던
캠핑장을 기억하고 먼저 그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길을 선후는 정확히 안내했다.
선후는 우리와 함께한 순간순간을 마음 깊이 아로새기는 듯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선후와 함께 보내며, 좋은 추억을 하나라도 더 심어주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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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해변에서 선후와 손잡고 거니는 모습. 함께 노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진정한 행복을 발견한다.




행복은 언제 오는 걸까? 웃음이 넘치는 순간일까? 원하는 걸 얻었을 때일까?
진짜 행복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려움과 나란히 걷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찾아온다.

장애는 어떤 목표를 갖는 것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장애를 넘는 일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목표조차 그 장애 속에 갇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열심히 무언가를 하다 보면 목표를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뜻밖의 선물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우리는 경험을 통해 배워가고 있다. 



우보만리, 함께 성장하는 길

그래서 우리는 좀 더 도전적인 목표를 세우기로 했다.
바로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는 스케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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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라인스케이트 대회에 참가한 선후의 당당한 모습. 바퀴 위에서의 균형과 자세는 얼음 위 스케이트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연중 지속 가능한 훈련이 되고 있다. 




스케이트는 선후가 유치원 때부터 좋아했던 운동이고, 마침 세종시에 반다비 빙상장이 생긴다니 하계에는 인라인스케이트, 동계에는 쇼트트랙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후 아빠는 한술 더 떠 전국장애인동계체전 입상을 목표로 해보자고 한다. 

"그게 가능해?" 하고 물으니, "아마 불가능할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무모한 도전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충분히 가능한 일도 자신감이 없어 포기하던 내가, 

"불가능하면 어때. 도전하는 게 멋있잖아"라는 아빠의 말에, 

"그래, 멋있는 게 중요하지"라며 맞장구쳤다. 선후를 키우면서 나 자신도 많이 변했다. 


이런 변화는 아빠에게도 찾아왔다.
선후의 장애가 심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던 내게
"내 인생 갈아 넣어서라도 선후를 행복하게 해줄게. 걱정 마"라며 위로해주던 선후 아빠는 지금도 모든 일정을 선후에게 맞추며 헌신하고 있다.
가끔은 농담처럼 "선후 덕분에 인간이 되었다"고 말하곤 한다.
살면서 최선을 다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는 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됐단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행복하단다. 


'우보만리(牛步萬里)'.
스케이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마음에 새긴 말이다.
예전의 경험도 있어 쉽지 않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소걸음처럼 느리더라도 꾸준히 나아가다 보면 결국 먼 길도 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구체적 목표는 없지만, 선후와 함께 가능한 한 먼 길을 가고 싶다.
가다 보면 분명 어려움도 있겠지만, 동시에 뜻밖의 행복도 마주하게 된다.
저 모퉁이를 돌면 또 어떤 예상치 못한 기쁨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 설레는 마음을 안고, 앞으로도 선후와 함께하는 우리의 행복한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최희경(52, 세종특별자치시 산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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